셰리, 버번, 피트까지. 종잡기 어려운 개성의 벤로막 10년

Main Shot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 차례 주인이 바뀌고, 제대로 제품 생산도 못 한 증류소에 재기의 기회가 있을까요? 벤로막(Benroach)은 이처럼 다사다난한 역사를 거쳤지만, 오늘날엔 여러 애호가에게 천천히 입소문을 타고 있는 위스키를 만듭니다.

벤로막 증류소의 엔트리 제품, 벤로막 10년을 살펴봅니다.

Bottle 1

제품 벤로막 10년(700mL)
분류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
생산지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Speyside)
알코올 43%
가격 71,900원(데일리샷)

벤로막 증류소

The Distillery

1958년(좌), 오늘날(우)의 벤로막 증류소, 출처 : Benromach

많은 스카치 위스키 증류소가 주인이 바뀌고 폐쇄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벤로막은 그중에서도 정도가 심합니다. 증류소는 1898년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 엘긴(Elgin) 근방 포레스(Forres)에 세워졌습니다. 출발부터 지지부진한 활동을 보이다 불과 2년 후에 사실상 문을 닫습니다. 이후 거의 1세기 동안 여러 번 주인이 바뀝니다. 그러나 전쟁, 보리 파동, 위스키 불황 등 각종 사건에 휘말리며 정상 운영은 요원한 채로 시간이 흐릅니다. 한때는 디아지오(Diageo)의 전신인 DCL(Distillers Company Limited)의 소유였지만, DCL도 30년 만에 손을 텁니다. 이 과정에서 플로어 몰팅도 그만두고, 증류소의 많은 설비가 빠져나갔습니다.

1993년, 엘긴의 독립병입자 고든앤맥페일(Gordon & MacPhail)이 벤로막의 새 주인이 됩니다. 고든앤맥페일은 황폐한 증류소를 인내심 있게 재정비합니다. 라가불린(Lagavulin) 증류소처럼 흰 건물 사이로 빨간 굴뚝이 덩그러니 솟은 증류소의 모습도 이때 만들어집니다. 전통 스페이사이드 위스키로 복고하자는 방침도 정해집니다. 다른 스페이사이드 위스키와는 달리 피트 처리된 몰트로 만들어지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산뜻한 논피트가 스페이사이드 위스키의 대표적인 캐릭터지만, 옛날에는 스페이사이드에서도 피트를 사용했습니다.

이후 16년이 지난 2009년에서야 엔트리 제품인 벤로막 10년을 출시합니다. 그야말로 고난과 끈기의 역사입니다.

단식 구리 증류기 2대, 총 8천 캐스크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3개. 스페이사이드의 유명 증류소(글렌피딕, 글렌그란트, 발베니…)에 비하면 귀여운 규모입니다. 하지만 제조 공정의 대부분이 여전히 수작업에 의존하는 위스키 공정 특성상, 작은 규모는 높은 관리 퀄리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후술할 위스키 벤로막의 독특한 캐릭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벤로막 10년

Package 1

증류소 색처럼 흰 바탕에 빨간 포인트 색상이 인상적인 패키지입니다. ‘핸드메이드’, ‘퍼스트 필 캐스크 숙성’, ‘Natural Colour(색소 안 탐)’, ‘세밀한 스모키’, ‘과실’, ‘크림’, ‘길고 풍부한 셰리’ 같은 말이 눈에 띕니다.

Package 2

구석에 수상 이력이 박혀 있습니다.

Package 3

Unpacking 1

Bottle 2

적당한 크기의 병입니다. 발베니 12년보다는 얇고 라프로익 10년, 글렌그란트 12년보다는 뚱뚱합니다. 겉 포장과 똑 닮은 색 조합을 가진 라벨이 붙어 있습니다.

Unpacking 2

붉은 금속제 포장을 벗기니, 마찬가지 적색으로 물든 코르크 마개가 드러납니다.

Glass

겉보기 밝은 꿀색입니다. 숙성 연수를 고려했을 때 결코 연한 편은 아닙니다. 색소도 타지 않았는데, 후술할 퍼스트 필 버번 캐스크의 영향인 듯합니다. 스월링하니 레그가 넓게 펴져 느리게 내려옵니다. 가벼운 색상인데 의외입니다.

Glass and Bottle 1

43도 치고도 찌르는 알코올 냄새가 나는 편입니다. 정제된 피트 냄새가 가장 먼저 감지됩니다. 거친 숯내나 묵직한 훈연향과는 다른, 가죽이나 마른 흙 같기도 한 잘 다듬어진 향입니다. 레몬, 깎은 잔디 같은 시트러스, 눅진한 포도 껍질 향기까지 쉽게 맡을 수 있습니다. 버터, 바닐라, 스카치 캔디의 단내가 느껴집니다. 향은 청아한 과실에서 고소한 크림 쪽으로 빠르게 바뀝니다. 침이 고이는 향입니다.

향은 굳이 비교하자면 발렌타인 싱글 몰트 글렌버기 12년, 하이랜드 파크 12년과 유사한 계열이라고 여겨지는데, 과자류 뉘앙스가 힘이 빠진 대신 피트 아로마가 섞여서 벤로악만의 독특한 개성이 느껴집니다.

Glass and Bottle 2

생각보다 가볍고 드라이합니다. 씨에 가깝게 깎은 복숭아를 먹었을 때처럼 쌉쌀한 맛이 납니다. 체리, 얇게 구운 피자의 크러스트. 계피 맛이 강합니다. 커피 같은 맛과 뒤섞여 시나몬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듭니다. 여러 맛이 느껴지는데, 균형이 아슬아슬합니다. 퍼스트 필 버번 오크통을 썼다는 점을 의식해서인지 바닐라 맛도 느껴지지만, 과일, 그보단 향신료 쪽 기류가 더 강해서 도드라지지는 않습니다.

퍼스트필 버번 캐스크는 버번 위스키를 숙성하는데 활용한 오크통으로, 사용시 강한 나무 향(버번 위스키는 숙성 시 새 오크통만을 사용해야만 하므로, 한번 사용한 오크통이라고 해도 오크통의 영향이 강합니다)과 더불어 버번의 특징인 바닐라, 캐러멜 등 특성이 위스키에 입혀지는 게 특징입니다.

피니쉬 드라이합니다. 스모키와 섞인 산미가 목을 찌르지만 한순간입니다. 과실향 많은 아라비카 품종 커피를 마시고 난 뒤처럼 새콤하고 개운한 향미가 혀에 남습니다.

낯설지만 즐거운

Glass and Bottle 3

벤로막은 대중적이거나 입문용 선택지는 아닙니다. 크게 유명하지도 않고, 맛의 방향도 개성적인 편입니다. 그러나 이런 브랜드를 접하는 일이야말로, 싱글 몰트 위스키의 세계를 탐험하며 조우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말에 동의한다면 벤로막 10년을 경험해 봄 직합니다. 프루트, 바닐라, 스모키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풍미가 벤로막 10년에서 어떤 조화를 이루는지 직접 확인하는 건, 분명 재미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