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라 최초의 증류소가 전하는 산뜻한 피트 위스키. 보모어 12년

Bottle and Glass 1

북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 한 섬이 있습니다. 어린 해마와 어른 해마가 얼굴을 맞댄 모양입니다. 서울만 한 크기인데, 사는 사람은 3~4천 명 정도입니다. 자못 황량한 곳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많은 위스키 애호가가 이 섬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아일라(Islay). 아일라는 대체 불가능한 개성 덕에 싱글 몰트 위스키 트렌드의 호혜를 입었습니다. 2024년 기준 아일라에 12개 증류소가 운영 중이거나 운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쩌다 그 섬에서 위스키를 만들게 되었을까요? 처음은 어디였을까요?

이 글에서 소개할 위스키는 아일라 최초의 증류소인 보모어(Bowmore)의 엔트리 제품, 보모어 12년입니다.

Bottle

제품 보모어 12년(700ml)
분류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
생산지 스코틀랜드 아일라
알코올 40%
가격 63,000원(1KMWINE, 더 술)

아일라 최초의 증류소, 보모어

Bowmore Distillery

보모어 증류소, 출처: Alexander Hanssen

아드벡(Ardbeg)라프로익(Laphroaig), 쿨일라(Caol Ila)…. 모두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로, 모두 아일라에 증류소를 뒀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 위스키 증류 기술이 넘어왔을 때, 지리적으로 두 섬 사이에 있던 아일라에서도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깨끗한 수원과 몰팅(Malting) 연료로 쓸 수 있는 이탄(Peat; 완전히 탄화되지 않은 석탄의 일종)이 풍부했기에 아일라는 위스키 만들기에 좋았습니다. 몰팅은 위스키 재료인 맥아를 얻기 위해 보리를 물에 담가 싹 틔운 후, 어느 정도 발아되면 건조해 발아를 중지시키는 위스키 조주 절차입니다. 이 건조 과정에서 이탄을 사용함으로써, 호평과 악평을 동시에 받는 아일라만의 독특한 스모키 노트가 탄생합니다. 병원, 치과, 화학 약품, 소독약…. 이탄을 사용한 피트 위스키 향의 묘사입니다. 기침이 나고 얼굴이 찌푸려져도 숨길 필요 없습니다. 피트 위스키 매니아에게는 그런 초심자의 모습마저 즐길 거리입니다.

Box

하지만 아일라에 취향 인정 받기 힘든 위스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1779년부터 시작된 역사로 아일라 최초의 증류소로 불리는 보모어도 그런 유형에 속합니다. 보모어 위스키의 페놀(Phenol) 수치(보통 몰팅 직후에 측정)는 25~30ppm 정도로, 라프로익(35ppm), 아드벡(50~65ppm), 옥토모어(140~258ppm)에 비하면 낮은 수준입니다.

아일라 한가운데 위치한 이 증류소의 정식 면허 취득 연도는 1816년이지만 여타 많은 증류소가 그렇듯 면허 취득 이전부터 위스키를 만들었을 거로 추정합니다. 보모어 2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소유주를 거쳐 2014년 라프로익과 함께 일본의 주류 기업 산토리(Suntory)에 인수되었습니다.

땅과 바다가 만드는 술

Malt

출처: Lutz Wernitz

보모어의 몰팅 과정에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27시간 동안 물에 담근 보리를 6~7일에 걸쳐 4시간마다 손수 뒤집어 건조합니다. 척 듣기에도 수고스러운 이 과정은 플로어 몰팅(Floor Malting)입니다. 기계식에 비해 생산량과 효율이 떨어지는 건 물론, 심지어 풍미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라프로익, 발베니, 하이랜드 파크를 비롯한 증류소 7여 곳에서는 여전히 이 전통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몰팅 후 나온 맥아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분쇄기로 가루 내고, 80년 된 구리 매쉬 툰(Mash Tun)에서 맥아즙이 되어 발효되고, 2번의 증류를 거쳐 마침내 숙성 단계에 이릅니다. 해안에 거의 붙어있다시피 지어진 No. 1 숙성고의 차갑고 습한 공기가 보모어 위스키의 캐릭터에 일조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기에 캐스크 피니싱(Cask Finishing) 처리를 더하면 마침내 한 병의 제품이 완성됩니다.

보모어 12년

Opened package

Bottle Rolling

보모어 12년은 보모어의 엔트리 제품입니다. 흑, 백, 금의 깔끔한 패키지입니다. 적당한 길이의 병목을 타고 내려와 넓어지는 끝부분에서 살짝 어깨를 으쓱하고 있는 병 형태가 독특합니다.

Pouring

겉보기 무대 조명을 받은 호른처럼 밝고 부드러운 보리 색입니다. 스월링하니 레그는 잔 표면을 얇고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Glass

자잘하고 까슬까슬한 알콜성 산미가 훅 들어옵니다. 그다음으로 지배적인 향은 역시 피트입니다. 익숙해지니 차츰 갯벌 짠 내, 푹 젖은 나무 장작 냄새도 느껴집니다. 과일이나 꽃 쪽 향기는 거의 없습니다. 억지로 찾는다면 물 많은 복숭아의 쌉쌀한 껍질 향이 있습니다. 약한 꿀 내음과 홍삼 같은 진한 풀뿌리 냄새가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경쾌하냐 진득하냐, 굳이 고르자면 후자였던 향과 달리, 입안에서 가볍게 미끄러지는 텍스쳐입니다. 그러나 드라이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꿀과 계피 맛 때문에 핫 토디의 느낌이 있습니다. 풀처럼 청초하고 날카로운 산미가 잠깐 스칩니다. 피트 스모키의 구수하고 쾌쾌한 맛이 있지만, 다른 피트 위스키처럼 굵직한 맛은 아닙니다.

Bottle and Glass 2

피니쉬 혀에 자몽처럼 쓴 산미가 남습니다. 전반적으로 개운하게 넘어갑니다. 되려 아로마가 남는 시간이 짧아 아쉬울 정도입니다. 캠핑장의 이른 아침에 쌀쌀하고 스모키한 숲 공기를 양껏 들이마신다면 이런 느낌이 남을 것 같습니다. 청량하지만, 공허합니다.

Glass, Bottle and Package

총평

약한 피트. 가벼운 무게감. 적당한 가격. 보모어 12년은 피트 위스키 입문용으로 완벽한 조건을 지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피트 위스키를 찾는 사람에게 보모어 12년 정도의 피트는 성에 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섬세한 밸런스 탓에 마셔도 마셔도 잘 모르겠는 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일단 이 순식간에 기화되어버리는 한순간의 반짝임을 의식하고 나면 찾아도 찾아도 새로운 면모가 발견되는 술이 될 것입니다. 이게 보모어 12년의 매력입니다.

당장 잘 모르겠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모금 더, 한 잔 더 마셔보면 될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