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은 수수가 풍성한 과실 향의 술이 되기까지. 반도정 고양

Bottle and Package

랩핑이 빛바랜 중국집의 음료 냉장고 한편에는 짧은 키의 술병이 서 있습니다. 투명한 유리병에 노란 뚜껑, 붉은 붓글씨는 콜라, 사이다의 스포티한 그래픽 사이에서 도리어 눈에 띕니다. 백간, 빠이갈, 고량주. 이 주종을 부르는 말은 여럿입니다. 중국의 증류주 백주입니다.

백주 반도정 고양과 함께 이 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Bottle and Glass 1

제품 반도정 고양(扳倒井 古酿)(500ml)
분류 농향형 대곡 고상 백주
생산지 중국 산둥성 쯔보
알코올 35%

백주와 그 분류

중국에는 여러 가지 술이 있습니다. 막걸리 같은 미주, 청주 같은 황주, 와인과 사과주도 있습니다. 백주는 수수(고량), 쌀 등 곡물을 재료로 하는 투명한 증류주입니다.

백주를 분류하는 방법은 많으나, 대표적인 방식은 향형 분류입니다. 즉, 술에서 나는 향에 따라 그 종류를 구분합니다. 세세하게 파고들면 수십 가지가 있으나, 크게 다음 다섯 가지로 분류합니다.

  • 농향형(濃香型): 파인애플, 농익은 곡물 같은 강한 향
  • 장향형(醬香型): 장류를 연상시키는 부드럽고 꼬릿한 향
  • 청향형(淸香型): 깔끔하고 상쾌한 향
  • 미향형(米香型): 증류식 소주나 청주처럼 쌀을 주재료로 하는 술에서 나는 고소하고 산뜻한 향
  • 겸향형(兼香型): 2가지 이상의 향형이 섞인 복합적인 향

백주 조주법

백주 만드는 법은 향형 분류라는 체계만큼이나 독특한 부분이 많습니다. 백조 조주법은 크게 다음 3가지로 나뉩니다.

  • 고상법(고태법)
  • 액상법
  • 고액상법(고액관증법)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고상법이고, 필요에 의해 다른 2가지 방식이 파생되었습니다.

먼저 고상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수수 등 곡물 재료를 찝니다. 여기에 누룩을 넣어 당화시킵니다. 이때 사용하는 누룩의 종류는 대곡, 소곡, 부곡 등 다양합니다. 누룩은 당화뿐 아니라 다음 단계인 발효에서도 영향을 끼치며, 누룩을 만드는 데 사용한 곡물에 따라 향형이 달라집니다.

Bandaojing Distillery

출처: 국정 그룹

어느 정도 당화가 이뤄진 재료를 니교(泥窖)라는 진흙 구덩이에 넣고 위에 흙을 덮습니다. 이 안에서 발효가 진행됩니다. 니교는 수십, 수백 년간 사용됩니다. 이 과정에서 각 니교마다의 특색이 생깁니다. 이는 곧 해당 백주 양조장의 캐릭터로 이어지기 때문에, 니교는 양조장의 가장 중요한 자산입니다.

니교 안에서 발효되는 도중에 몇 번씩 새로 당화된 재료를 추가 투입하며 니교를 채웁니다. 이렇게 발효가 끝나면 증류기에 넣어 증류하고, 숙성 단계를 거친 후 블렌딩하여 최종적으로 한 병의 제품이 완성됩니다.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 고상법으로 만든 백주는 조주 중에 물을 추가하는 과정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재료를 찌고, 식히는 과정에서 사용된 물이 전부입니다.

수수와 같은 전통적인 백주의 재료는 알코올 수율이 높지 않습니다. 1960년대에 백주 수요가 늘어나면서 고상법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액상법이 탄생했습니다. 곡물 재료를 누룩으로 당화시키고 니교에서 발효시키는 대신, 여타 수율이 좋은 곡물로 당화액(술밥)을 뽑고 증류 시 고상법대로 만든 밑술이나 향료를 첨가하여, 고상법보다 많은 양의 술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액상법은 고상법과 액상법을 적절히 혼용한 형식입니다. 당화 또는 발효 단계까지는 고상법을 따르다가, 이후 주정 등 최종 결과물의 양을 늘릴 수 있는 재료를 투입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소개할 반도정은 농향형 대곡 고상 백주입니다.

반도정 역사와 기록

반도정을 만드는 산둥 국정 그룹은 중국 산둥성 쯔보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거대한 황하 삼각주에 걸쳐 있어 술 빚기 좋은 환경입니다. 연중 따뜻하고 습해 술의 재료가 되는 작물이 잘 자라고, 백주 발효 시 결과물의 풍미에 큰 영향을 주는 각종 미생물이 잘 죽지 않습니다. 또한 큰 광천수 수원이 있어 모든 술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물 공급이 원활합니다.

이런 위치에 있는 국정 그룹은 중국에서 가장 큰 백주 양조장 중 하나입니다. 국정 그룹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백주 주장(술 보관 창고)을 보유한 것으로 기네스북에 선정되었습니다. 42대의 증류기와 2,916개의 니교를 가진 국정 그룹은 중국 내 최대의 순양 고태발효 백주(중국식품공업협회의 주류 품질 인증) 양조장입니다.

고대 제나라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백주를 비롯한 각종 술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헤리티지는 반도정에도 이어집니다. 중화민국 시절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개최된 1915년 파나마 만국박람회(파나마-태평양 국제 박람회)에 출품된 반도정은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반도정(扳倒井)이라는 이름 자체는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의 건국 설화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지역으로 군사 원정을 떠난 조광윤이 병사들에게 먹일 식수를 찾았으나 우물은 말라 있었습니다. 조광윤이 기도하자 마른 우물에서 물이 쏟아졌고, 이에 보답으로 우물에 반도정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것입니다.

반도정 고양 시음

Package

Bottle

겉보기 무색투명합니다. 스월링하면 산호초 모양의 레그가 얇게 쌓여 내려갑니다.

Bottle and Glass 2

파인애플주스 같은 단내가 훅 풍깁니다. 쿰쿰하고 짭초름한 비린내가 있습니다. 물기 많은 복숭아처럼 청량한 과실 향이 나면서, 동시에 청포도 캔디처럼 눅진한 방향의 과일 냄새도 있습니다. 고수 같은 향신료 향도 조금 있습니다. 계속해서 맡다 보니 퍽퍽한 갈색 빵에서 풍기는 고소한 곡물 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노징 글라스에 코를 깊게 들여도 향을 음미하기에 부담 없는 도수입니다.

저항 없이 미끄러지는 텍스쳐입니다. 에멘탈 치즈의 뒷맛처럼 꼬릿하고 짭짤한 첫맛 이후에, 해산물 혹은 젓갈 같은 음식에서 느낄 수 있는 쌉싸름함이 지나갑니다. 자몽의 시트러스, 귤껍질에서 맛볼 수 있는 동글동글한 쓴맛이 다음으로 찾아옵니다. 맛의 폭 자체는 넓지 않은데 생소한 조합이라서 인상에 남습니다.

피니쉬 오물오물 맛보다 목구멍으로 넘기면 금속성의 찌릿한 맛이 올라옵니다. (에어링을 오래 하니 이 향미는 사라졌습니다) 도수에 비해 입안이 건조한 느낌이 있습니다. 진디를 씹는 것처럼 씁쓸한 산미가 주로 남습니다.

Bottle, Package and Glass

총평

반도정 고양은 무겁지 않게 백주의 매력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향미도 충분히 깊은 술입니다.

자극적이고 기름진 중식과의 조합은 물론, 그냥 니트로 마셔도 좋을 정도로 완성도가 괜찮았습니다. 음식점에서 잔술로 곁들이는 대신 한 병을 사서 넉넉한 기간에 여러 조합을 시도해 보면, 단순히 파인애플 향 나는 술이 아니라 상상 이상으로 복합적인 풍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수입처가 제한적인듯해, 한국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 접근성이 아쉽습니다.

백주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데 생각했던 것보다 흥미로운 술인 것 같습니다. 이래서 새로운 술 맛보기를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