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이른 여름맛. 아드벡 10년
냉동칸에 큼직한 얼음 몇 개 놔두면 좋을 계절이 가까워졌습니다. 묵혀두었던 얼음 틀을 박박 씻는데 문득 거의 석 달간 위스키를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이래저래 타이밍이 맞지 않은 탓입니다. 그보다는 돈도 없는 주제에 입맛이 높아져 버린 탓입니다. 지난해 연말을 자축하며 남대문 시장에서 구해온 글렌피딕 12년에 제 짧은 미식관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그전까지 위스키는 어쩌다 재미 삼아 마셔보는 술이었습니다. 그저 손이 가는 레이블의 술병, 가격 정도만 보고 사 마시는 술이었습니다. 그러나 글렌피딕으로 알아버린 싱글 몰트 위스키의 매력은 저를 성실한 학생으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저는 겨우내 남대문 시장을 떠돌았습니다.
지난 3개월 동안 위스키를 마시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확 다른 무언가를 마시고 싶었습니다. 예전에 한 유튜브 영상에서 봤던 이름, 아드벡이 떠올랐습니다. 소독약 냄새가 난다고 했던가? 그만큼 색다른 맛이 고팠습니다.
회현역에 도착하면 길이라도 잃어버릴세라 친절하게 남대문 시장 쪽 표시가 이곳저곳 붙어있습니다. 샛길은 많지만 5번 출구로 빠져나와 곧장 오른쪽 큰길로 갑니다. 무리하게 현대화시킨 전통시장이라는 느낌이 딱 드는 거리는 외국인으로 바글바글하던 모습이 무색하게 허전한 모습니다.
수입품을 취급하는 상가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남대문 시장 지하상가의 분위기는 딱 이런 느낌입니다. 한 걸음 되는 복도에 상인과 손님이 뒤섞여 정신없는 미로를 형성합니다.
제품 | 아드벡 10년(750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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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싱글 몰트 스카치 위스키 |
생산지 | 스코틀랜드 아일라 |
알코올 | 46도 |
패키지를 받아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두 면에 걸쳐 크게 박힌 아드벡의 심볼입니다. 아드벡은 피트로 유명한 아일라섬의 위스키입니다. 피트는 석탄으로 완전히 바뀌기 전 상태의 연료입니다. 발아하여 맥아가 된 보리를 건조할 때 피트를 사용하면 익숙해지기 힘든 향을 풍기는 위스키가 만들어집니다. 때문에 아일라에서는 라프로익, 부나하벤처럼 매니악한 위스키가 위스키가 많습니다. 이 사실이 아드벡 심볼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더하면서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전체적으로 컴컴한 바탕에 드문드문 빛나는 금박 포인트도 묵직하고 우아합니다.
패키지는 오픈하는 순간까지 분위기가 음습합니다. 아드벡 심볼과 별개로 고상한 덩굴무늬 모티브는 패키지에서 코르크 포장에 이르기까지 신비스러운 느낌이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아드벡을 만났습니다. 아드벡 10년은 버번위스키를 숙성했던 오크 통에서 만들어진 알코올 농도 46%의 싱글 몰트 위스키입니다. 아드벡의 모든 라인업은 냉각 여과를 거치지 않습니다. (Non Chill-Filtered) 냉각 여과는 용액의 온도를 낮추어 불순물을 가라앉혀 제거하는 방법인데, 원치 않는 각종 성분 역시 같이 여과될 수 있는 방식으로 아드벡처럼 냉각 여과를 사용하지 않는 증류소도 상당수 있습니다.
코르크 포장을 벗기고 마개를 틀어 올립니다. 생각보다 향이 얌전합니다. 코르크를 열었을 때 말 그대로 방 안 한가득 향기를 풍기는 위스키도 있지만 아드벡은 그 축에는 끼지 않는 듯합니다. 잔에 따라보니 색상도 옅은 노란빛으로 진한 편은 아닙니다. 물론 숙성 기간 자체가 길지 않은 탓입니다. 잔에 코를 대고 향을 맡아보니 굉장히 신선합니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편인데도 알코올 부즈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기분 나쁘게 어지러운 냄새가 아니라 깔끔하게 달콤한 풀꽃 같은 냄새가 납니다.
상큼한 과일 향이 나는 건 아니고 시원한 바닷바람에서 날 듯한 일종의 상쾌함이 전반에 깔려 순하고 눅진한 사과 향과 백합류의 꽃에서 맡아볼 수 있는 부드러운 향기가 섞여 있습니다.
한 모금 마셔보니 기대 이상으로 맛이 풍부합니다. 짜고 씁쓸한 피트 맛이 가장 먼저 느껴집니다. 아드벡의 맛은 포도와 체리 사이쯤에 있는 신 과일로 이어지고 딱 적당한 텁텁함과 견과류 향기를 혀끝에 남겨 놓습니다. 기분 좋게 입안을 찌르는 스파이시함도 곁들여집니다. 이렇게 다양한 풍미에도 맛의 전반을 꽉 쥐고 있는 건 젖은 해변의 차고 신선한 흙내입니다. 맛과 향이라는 것은 특정한 인상을 주기 마련인데 아드벡의 맛과 향은 검은 자갈 깔린 쌀쌀한 바닷가를 세밀하게 그려낸 느낌입니다. 무언가를 맛보고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받은 건 정말 오랜만입니다.
손뼉을 치고 싶을 정도로 만족한 위스키였지만 한잔 두잔 마셔보니 취향을 빗겨나가는 부분이 몇몇 있기는 합니다. 신맛에서 스파이시한 느낌으로 변해가며 땅콩과 말린 과일 맛으로 남는 피니시가 바닷바람을 연상시킬 정도로 쾌청했던 첫맛에 비해 힘없이 어중간한 느낌이라 아쉽습니다. 그래도 전반적인 맛은 좋은 편입니다. 위스키라고 하면 진한 달콤함이나 고소함을 떠올리기에 십상인데 아드벡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기분 좋게 만들어줍니다. 패키지가 주는 분위기와 향, 맛이 정말로 딴판이라는 점도 유쾌합니다.
아드벡은 파도가 떠오르는 시원한 맛의 위스키입니다. 햇볕 쨍쨍한 여름에 그늘에서 얼음 하나 무심히 넣고 즐기면 그보다 나은 게 없을 겁니다. 아드벡은 피서지 같은 위스키입니다.
여름까지 남아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