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불편하다

Monkeys

어느 순간 게임중독이라는 단어마저 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는 TV 중독이라는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기술과 문화에 대한 대항 의식은 중독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것에 대한 일종의 액땜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이 기류가 많이 약해졌습니다. SNS 중독이라는 말이 반짝하더니 금방 사그라든 것이 좋은 예시입니다. 기술과 문화가 도입되고 적응되는 과정이 점점 빨라지면서 사람들의 의식도 그 속도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게임과 스마트폰의 예시에서 알 수 있듯, 디지털 프로덕트는 이러한 ‘신기술 열병’의 대표적인 대상입니다. 기술혁신의 속도가 굉장한 데다가 우리의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디지털 프로덕트에 쏟아지는 요구는 날이 갈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유용한 디자인이 필요했던 초기 제품과 비교하면 최근의 제품은 더 쉽고 간편해야 합니다. 제품에 대해 학습하고, 제품을 시험하여, 전환을 결정하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개인이 주체적으로 해결하는 행동 양식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 티타임의 열두 번째 이야기는 그 너머에 대한 것입니다. 유용한 디자인, 쉬운 디자인. 그다음이 무엇일지 생각합니다.

숨 쉬듯 멀티태스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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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슨노먼그룹의 UX 전문가 케이트 모런(Kate Moran)과 킴 플래허티(Kim Flaherty)는 지난 10월 Life Online Project의 결과에 대한 칼럼을 냈습니다. 토론토, 캔자스, 상하이 등 3개국 6개 도시에서 이뤄진 글로벌 UX 연구는 마냥 평범했던 일상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부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멀티태스킹에 대한 연구 결과입니다. 오늘날에는 일하던 도중, 빈둥거리던 도중, ‘귀가 심심해서’ 음악을 찾아 듣는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장 유튜브에도 만 단위의 조회 수를 기록하는 수많은 재생목록과 반복 음원이 있습니다. 음악을 감상 목적이 아닌 심심풀이로 소비하는 인구는 그만큼 많습니다. 스마트폰과 같은 휴대용 기기의 발달과 여러 서비스가 주도하는 디지털 음원 시장의 부흥은 이러한 경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2018년의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 주도적으로 배경음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음악뿐만이 아닙니다. 영화를 보던 와중에, 독서를 하던 와중에 모바일 게임을 하거나 메신저, 혹은 SNS를 둘러보곤 합니다. 생산성에 구애 받지 않는 여가 활동에서도 많은 사람이 디지털 프로덕트를 통한 멀티태스킹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일상의 일부가 돼버린 페이스북, 트위터와 틱톡(TikTok)을 비롯한 신종 SNS의 등장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Life Online Project의 여러 피연구자는 정적을 메우려는 자신의 경향을 잘 알고 있다고 답변했으며, 단지 심심풀이로 진행하는 이러한 멀티태스킹에 대해 스스로 디지털 프로덕트 사용을 의식하려고 노력 중이라 말했습니다. 디지털 프로덕트를 문제없이 써오던 이들이 자신의 서비스 사용 태도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오후 11시, 클라이언트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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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서비스이든 비즈니스외 연결된 것이라면 리텐션(Retention)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뒤섞이고 영향을 주고받는 현대의 디지털 프로덕트 시장에서 직접 전환을 통한 사용자 유치는 힘든 일입니다. 사용자의 재방문이라는 드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케팅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연구가 이뤄졌습니다. UX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 열한 번째 이야기에서 언급한 Hook 모델이 대표적입니다. 이 모델은 사용자가 치밀하게 설계된 서비스의 네 단계(계기 → 액션 → 보상 → 투자)를 거치게 하여 질 좋은 리텐션을 확보하는 모델입니다.

그런데 Life Online Project의 연구에서 이러한 비즈니스 경향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예시가 발견되었습니다. 수많은 앱 알림을 수신하고, 끝도 없이 펼쳐지는 할인 목록을 스크롤 하며, ‘좋아요’를 주고받기를 몇 시간째 이어가다 지쳐 떨어지는 일입니다. 이런 사용자는 서비스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비생산적이고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고 생각합니다. 케이트와 킴은 이런 사용자 행동 패턴을 통제 불능에서 오는 혼란, 볼텍스(Vortex)라고 정의했습니다.

볼텍스는 단 한 번의 의도적 인터랙션이 연속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인터랙션을 가져올 때 시작하는 사용자 행동 패턴이다. 이 일련의, 의도하지 않은 인터랙션은 사용자가 자신이 디지털 공간에 깊게 말려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며, 통제 불능의 상황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 케이트 모런과 킴 플래허티, 볼텍스 : 「사용자가 그들의 디바이스에 빠져버렸다고 느끼는 이유」

중독 증세와 볼텍스의 명백한 차이점은, 볼텍스가 사용자의 불쾌감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실은 스마트폰으로 매 순간 수신되는 알림을 대할 때 두드러집니다. 많은 사용자는 이미 수신되는 알림 대부분을 무시하거나 보는 것을 미룹니다. 디지털 세상과의 과도한 연결은 사용자를 지치고 성가시게 만듭니다. 쇼핑 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제품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얼른 구매해야 하고, 저 물건은 최저가로 판매 중입니다. 비즈니스를 위해 설계된 많은 요소가 사용자를 채찍질합니다. 사용자는 빠져나가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지도 않습니다. 볼텍스가 서비스 이용의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쁜 벌꿀이 달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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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정리하면, 오늘날의 사용자는 디지털 프로덕트 소비를 굉장히 즐깁니다. 정적인 시간을 피하고자 다양한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활용합니다. 여가도 아까워서 영화와 게임을 동시에 즐기기도 합니다. 디지털 프로덕트의 장점인 접근성을 거의 최대로 끌어올린 듯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서는, 서비스를 사용하다 그것에 지쳐갑니다. 그런 디지털 프로덕트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사용자를 괴롭힙니다. 그럴 의도가 명백하게 없어 보이지만, 어쨌든 현상은 일어납니다.

쉴 새 없이 디지털 프로덕트를 소비하고, 동시에 그것에 지쳐가는 사용자. 앞서 언급한 리텐션을 위한 비즈니스 액션이 이런 피드백을 가져왔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액션은 사용자의 보상 심리를 건드려 재방문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상황에 비춰보아, 이러한 액션이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사용자는 자신의 풍요로운 일상을 조금이라도 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새 디지털 프로덕트를 망설이지 않고 사들입니다. 전자상거래, 인터넷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가 등장한 이래 그것들의 후퇴는 없었습니다. 공급과 수요, 콘텐츠와 비즈니스 플랜이 완비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흔히 멜론과 스포티파이를 이야기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과 트위터에 올릴 맨션을 고민합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디지털 프로덕트의 설계는 기묘한 위기를 맞습니다. 앱 알림, 이벤트, 평점과 유저 피드백…. 사용자를 서비스에 묶어두던 설계가 사용자를 귀찮게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겉보기에 계획은 유효한 것처럼 보입니다. 투덜대는 사람은 있어도 서비스 사용자는 줄지 않습니다. 그러나 줄지 않는 건 볼텍스에 빠진 사용자도 마찬가집니다. 쏟아지는 디지털 프로덕트를 즐기기 위해 멀티태스킹으로 여가를 보내는 것도 불사하는 이들이지만, 그것을 마냥 긍정적인 경험이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편안한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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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프로덕트와 매 순간을 함께하는 사용자, 그만큼 중요해지는 서비스, 그렇지만 싫증 내는 사람은 하나둘 늘어갑니다. 그래서요? 사용자에게 강요된 비즈니스 플랜 때문에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나는데, 디자이너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2018년은 2017년, 2016년, 그리고 1913년이 그랬듯 여전히 소비의 시대입니다. 개발자는 사용자를, 사용자는 서비스를, 서비스는 개발자를 소비하며 단단한 연결고리를 만듭니다. 현대인은 한순간이라도 소비를 멈출 수 없습니다. 이는 강경한 환경운동가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타인에게 협력적입니다. 디지털 세상에서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협력적 태도를 보다 기분 좋은 경험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프로덕트의 초창기에 사람들은 새로운 것, 유용한 것을 원했습니다. 웹을 단순한 텍스트 덩어리 이상으로 활용하기 위해 모자이크가 탄생했고, 현대적 GUI를 사용할 수 있는 매킨토시가 등장했습니다. 이윽고 디지털 세상은 전문적이고 유용한 도구들로 가득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문제없이 쓸 수 있는 것, 다루기 쉬운 것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수준은 제각각이었고, 그 누구도 어디에 기준을 맞춰야 하는 지 몰랐습니다. 논문 주제나 경영 방법론에 머물러 있던 사용자 경험이 화두가 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이제 개발자들은 기능 이전에 그것을 사용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사용자를 예측하고, 모색하고, 계획합니다. 이제 디지털 세상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 가득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디지털 프로덕트와 꼭 붙어살면서, 치밀히 설계된 그것에 신음합니다.

편안한 디자인을 주장하는 건 위의 사실 때문입니다. 기능이 부족해서 채웠습니다. 난도가 높아서 낮췄습니다. 사용자의 요구는 시간이 갈수록 근본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서비스에서 불편함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을 소비하는 사용자는 마찬가지로 불편합니다. 사용자를 소비하는 개발자도 따라 불편합니다. 편안한 서비스, 편안한 사용자, 편안한 개발자, 편안한 디자인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사용자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적당히 줄이고, 보상 또한 가볍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치근덕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액션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개개인은 모두 다릅니다. 쉬운 디자인처럼 무작정 난이도를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개인화가 여전히 주목을 받는 까닭입니다. 편안한 디자인은 더 많은 A/B 테스트, 더 깊은 사용성 검증, 더 자세한 사용환경 조사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 끝에서 얻어내는 건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편안함이 될 것입니다.

편안할 수 없는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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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약간 억울한 디자이너도 있을 겁니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서 리서치도 하고 싶고, 햄버거 메뉴는 쓰기 싫고, ‘할인 중’ 배지는 적당히 달고 싶은 건 당연한데, 그러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기껏해야 달 수 있는 건 iOS 12의 스크린 타임이나 인스타그램의 사용시간 제한 기능 같은 부가적이고 사후적인 기능뿐입니다. 그게 비즈니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즈니스와 디자인은 결국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비즈니스는 디자인이라는 도구가 없으면 맥을 추리지 못하고, 디자인은 비즈니스라는 목표가 없으면 의미도 없습니다.

지금이 가장 흥미로울 때라고, 도널드 노먼(Don Norman) 교수는 말합니다. 자율주행, 증강현실, 인공지능 등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뒤바꿔버릴 기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사용자의 의식적인 액션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혹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액션을 수렴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요? 사용자를 불편하거나 무섭게 만들지는 않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도전해야 하고, 이는 디자이너에게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편안한 디자인에 대한 고심은 이런 흥미진진한 시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보다 넓게, 깊게, 길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 편안한 일은 아닙니다.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가 건드려야 하는 것은 논리적인 부분을 넘어선 영역입니다. 기존의 방법론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도전은 아닙니다. 사용자의 불편함이 또다시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소비하는 우리는 그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제 불편한 멀티태스킹과 볼텍스를 넘어서 편안한 디자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말씀드렸듯, 지금이 바로 흥미로울 때니까요.😎

참고자료

Kate Moran and Kim Flaherty - 「The Vortex: Why Users Feel Trapped in Their Devices」

Kate Moran and Kim Flaherty - 「Filling the Silence with Digital Noise」

Tristan Harris - 「How Technology is Hijacking Your Mind — from a Magician and Google Design Ethic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