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런스 다시 읽기
커피 한 잔이 준비되었습니다. 휴대폰과 태블릿 PC는 만족스럽게 충전 중이고, 온도도 습도도 완벽합니다. 작업 사전 준비는 확실하게 끝났습니다. 이제 창조성만 발휘하면 됩니다. 작업 준비를 마치고 의자에 앉자마자 고뇌가 밀려옵니다. 아이디어가 부족합니다. 보통의 디자이너는 이런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루틴을 돕니다 :
-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 래퍼런스를 참고하자.
- 예쁘고 멋진 것 투성이다.
- 난 아마 안될 거야
- 다시 1로.
이런 일은 때때로 있는 것도 아니고 종종, 아주 자주 찾아옵니다. 디자이너라는 노동자는 만성적인 영감 부족에 시달립니다. 잠깐 자신도 놀랄 정도의 창조성을 선보이다가도 금방 단물 빠진 껌처럼 늘어지기 마련입니다. 별수 없습니다. 또 래퍼런스나 봐야지. 디자인 티타임의 일곱 번째는 영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터랙션 디자이너는 어디에서, 어떻게, 왜 영감을 얻어야 할까요?
예술가의 뮤즈 VS 디자이너의 뮤즈
내로라하는 예술가에게는 자신만의 뮤즈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뮤즈는 예술가가 불후의 명저, 명곡, 명화를 만들어내도록 유도합니다. 그런 행운이 디자이너에게도 있을까요? 있더라도, 예술가의 뮤즈와는 상당히 다를 겁니다. 예술과 디자인의 극명한 차이 때문입니다.
예술은 미의 표현입니다. 일방적인 영감의 표출입니다. 가끔은 독선적입니다. 예술가는 자신에게 의문을 던집니다. 이런 생각은 맞을까, 이런 표현은 괜찮을까, 이런 이야기는 잘 전달될까. 예술가는 스스로 분투하며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디자이너는 다릅니다. 디자인은 산업 혁명 이후 예술과 분리되면서 첨예한 양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디자인은 대화입니다. 타협의 정도만이 구분될 뿐입니다. 디자이너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생각은 어떤가, 이런 표현은 편리한가, 이런 이야기는 잘 전달되는가. 디자이너는 만인과 대화하며 작품을 설계합니다. 기본적으로 디자인이 비즈니스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구성주의가 모더니즘과 그리드 시스템의 유행에 영향을 준 것처럼, 예술과 디자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 무수한 공통점 중 대표적인 것이 시청자, 사용자, 독자 등 작품을 경험하는 상대를 가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주제가 다를 뿐입니다. 한데 뮤즈와의 만남이 편의점 들리는 것만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 디자이너는 쏟아지는 업무에 매일 같이 영감을 갈구하는 상황에 부닥쳐 있습니다. 뮤즈를 만날 수 없다면 스스로 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 전에, 오늘날의 디자이너는 어떤 영감을 얻어야 할까요?
보잘 것 많은 자부심
디자인 사고는 사람을 이해하고, 이들에 대한 좋은 스토리를 만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 더그 파웰(Doug Powell, IBM 디자이너)
좋은 디자인이 좋은 비즈니스라는 인식은 19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소비사회의 전형으로서 나날이 발전하고 있던 그곳에서는 디자인은 상품 일부였습니다. 소비자의 만족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CI의 시대가 오고, 곧이어 UX의 시대가 왔습니다. 기업, 브랜드에서부터 제품의 프로모션 비디오까지, 고객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설계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디자이너만 써왔던 방법론을 기업 전반으로 확대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스타트업과 벤처 기업 뿐만 아니라 대기업도 이 흐름에 대응해야 했습니다.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는 그렇게 주류가 되었습니다.
디자인 사고는 문화를 만드는 방법론입니다. 문제를 이해하고 파악해서 많은 시도를 반복합니다. 이 단순한 프로세스가 중요합니다. 협업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디자인 사고는 이 과정에서 참신하고 효과적인 해결방안을 만들어냅니다. 디자인 사고의 특성인 인간에 대한 공감은 사용자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도 해당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인간적인 프로세스에서 인간적인 문화를 창조하는 겁니다.
결국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영감은 이런 문화를 만들기까지의 시행착오입니다. 기술자는 기술을 최적화된 모습으로 구현하고, 디자이너는 어떻게 이를 사람에게 전달할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그 고민에서 우선해야 하는 것은 합리성입니다. 본질적인 목표, 기술을 더 쉽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것은 결코 차순위로 밀려날 수 없습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심리학·통계학적 자료가 빛을 발하는 부분입니다. 일단 합리성이 충족되면, 다음으로 독창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신선한 자극을 원하는 고객에게 브랜드와 서비스의 개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는 브랜드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로 생각해봐야 하고, 수많은 사례를 접해야 합니다. 시행착오도 준비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디자인
툴 켜고 마우스 잡기 전에, 연구 리포트 하나 읽어보는 게 어떨까요? UX 연구(UX Research)는 사용자가 어떻게 서비스를 사용하는지 추적해서 특정 UX의 효용성을 파악하는 연구입니다. 마케팅 연구보다 아직 규모가 크지 않고, 특히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연구입니다. 그러나 인터렉션 디자이너에게 그 중요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연구 결과가 합리적인 디자인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는 기본적으로 논리적이고 경험론적입니다.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찾을 수 없어도 필요한 만큼의 경향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겁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디자인이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인터렉션 디자인에서는 예상 사용자의 범위에 최대한 들어맞게끔 타협하는 게 중요합니다.
UX 연구에 전문적인 대표적인 단체는 닐슨 노먼 그룹(Nielsen Norman Group입니다. 1998년 제이콥 닐슨과 돈 노먼에 의해 설립된 이 저명한 단체는 전세계 순회 세미나와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300개가 넘는 기업이 닐슨 노먼 그룹의 도움을 받았고 이들의 분야도 금융업에서 뉴미디어, 의료산업까지 다양합니다. 닐슨 노먼 UX 연구 결과를 토대로 영양가 있는 글을 많이 게시합니다. 웹 콘텐츠를 읽을 때 나타나는 시선의 F형 패턴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흥미로운 주제의 글이 많기 때문에 이들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눈여겨 볼만한 또 다른 웹 페이지는 UX MYTHS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페이지는 UX 디자이너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사실에 대해 다룹니다. 그들을 증명하는 쪽으로요. 아이콘이 사용성을 증대하긴 어렵다는 내용부터 공백의 중요성, 사용자를 고려할 때 쉽게 할 수 있는 오해, 그리고 접근성과 미학 사이에서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디자니어의 따귀를 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국어를 포함한 12개 언어로 번역된다는 점 역시 흔치 않은 장점입니다.
눈으로 그리는 디자인
UX 연구를 조사하면서 디자인의 근거를 마련하는 일은 요리에서 괜찮은 식자재를 수확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좋은 요리는 좋은 재료에서 나옵니다. 디자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료만 있다고 음식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요리하기 위해서는 레시피가 필요합니다. Mobbin은 그런 역할에 안성맞춤입니다. 출시된 앱의 페이지를 구분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패턴별로 UI를 볼 수 있습니다. UI가 브랜드에 맞춰 독창성을 창조하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사용자에게 익숙한 몇 가지 전형은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패턴 내에서도 개성은 찾을 수 있습니다. Mobbin은 온보딩, 콘텐츠, 소셜 등 여러 상황에서 사용되는 내비게이션, 다이얼로그, 필터 같은 패턴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사례를 비교하며 분석하는 데에는 무척 유용한 서비스입니다.
패턴과 별개로, 최근 UI 동향은 더 많은 동적 요소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인터렉션의 피드백 애니메이션뿐만이 아니라 온보딩이나 히어로 이미지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용자의 이목을 끌고 생생한 내용을 전할 수 있는 점에서 큰 장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트렌지션 애니메이션조차 익숙하지 않은 디자이너가 많습니다. UX Movement는 그런 상황에서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매주 다른 UI 예제를 볼 수 있는 이 웹 페이지는 호버, 클릭 등 피드백 종류와 버튼, 폼처럼 UI 요소가 모여있는 태그를 통해 필요한 예제를 빠르게 필터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냥 아무것도 생각 없이 영감이 박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번개가 치듯 뇌리에 꽂히는 그런 영감을 원하는 것입니다. 본래 영감은 많은 기반지식 위에서 생기는 것이긴 하지만, Muzli Design Inspiration이 번쩍이는 영감을 위한 방아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서비스는 웹 페이지·모바일 앱 디자인 같은 기본적인 예제부터 독특한 예술 작품과 디자인 칼럼까지 모아서 보여줍니다. 느긋하게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퍼뜩 영감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생각. 시도. 다시 생각
만일 협업을 하고 있다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바둑판 같은 사무실과 화이트보드 하나로 창의력을 억제하는 게 아니라, 쉽게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 쉽게 다른 이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구조의 공간에서 마음껏 생각을 펼치는 것입니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공간에서 창의적인 생각이 나온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공간에서는 일상적이지 않은,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기 마련이고 이는 공간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색다른 영감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물리적인 환경보다 중요한 건, 서로 격 없이 이야기하는 자유로움이라는 정서적 환경이지만 말입니다.
오늘날 UX를 고려하지 않는 서비스는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UX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활용 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디자인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디자이너가 사유해 봐야 할 생각의 가짓수도 늘었습니다. 더 고민하고, 더 기민해야 합니다. 더 많은 영감이 필요해졌습니다. 합리성과 독창성을 모두 챙기기 위해서는 위에서 소개한 것들로는 부족할 겁니다. 그렇지만 방법은 여전합니다. 끊임없는 대화, 생각, 시도. 좋은 디자인을 위한 조건은 바뀐 적이 없습니다.
참고자료
Nadia Cameron - Why design and human-centred design thinking is so important to IBM
Nichole Elizabeth DeMeré - Do you need a creative safe space for your design t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