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스트는 「월든」을 읽는다
글 사이에 인용된 「월든」의 구절은 도서출판 이레에서 출판한 강승영 역자의 번역본을 따르고 있습니다.
디터 람스의 디자인을 보면 녹슬지 않는 디자인이 무엇인지 한눈에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유려하되 과하지 않은 그의 디자인을 보면 80년의 세월이 무색합니다. 현대적, 심지어 미래적으로 보입니다. 디터 람스는 1960년대에 시작한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디자이너입니다. 디자인에서 미니멀리즘은 거대한 물결이 되었습니다. 모든 장식은 실용적이었고, 모든 형태는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함의 미학이라 일컬을 만 합니다.
2013년 iOS7의 공개 이후 스큐어모피즘은 주류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인터렉션 디자인의 세대교체, 플랫 디자인을 선두로 한 현대 미니멀리즘의 부흥이 발생한 겁니다. 이렇듯 현실이든, 디스플레이 속이든, 디자인의 주류는 명백하게 미니멀리즘입니다. 인간의 감각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사물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각적 포화 상태는 더욱 단순한 형태, 직설적인 의미, 다방면의 활용성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결책이 미니멀리즘이었던 겁니다.
최근 미루고 미루다 「월든」을 다시 읽었습니다. 풀냄새 짙은 18장의 이야기는 여전히 느긋했습니다. 그러나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내용을 곱씹어보니 흥미로운 관점이 엿보였습니다. 150년도 더 된 고전과 현대의 미학인 미니멀리즘 사이의 연결이었습니다. 디자인 티타임의 아홉 번째 이야기는 이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소로는 미니멀리스트였던 것일까요?
나무꾼이자 실험자
「월든」은 지루합니다. 별로 흥미도 가지 않는 이야기를 자세히, 길게 늘어놓습니다. 겨울철 호수에서 얼음을 끌어내는 이들의 모습이나, 숲속의 곤충과 동물들이 어떻게 우는지를 설명합니다. 작가의 취향은 차고 넘쳐서, 동양철학 내용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벼운 내용을 다루는 것도 아닙니다. 당대의 문제부터 좀 더 철학적인 사색까지 모두 구구절절하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월든」을 읽다 보면 무거운 내용이 전혀 무겁지가 않습니다. 투명한 호수와 뛰노는 물고기에 대한 묘사를 접하다 보면 답이 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월든」은 이렇게 청명한 글입니다.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 불복종」으로 더 유명할 겁니다. 교과서에도 그리 실렸으니 말입니다. 간디와 마틴 루서 킹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는 강경한 사람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독선적이기까지 합니다. 인두세 납부 거부로 투옥된 일은 유명하고, 노예 해방 운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사색하고 가설이 나오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실험했던 실험자이자 피실험자였습니다.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콩코드에서 죽은 그는 매 순간 자연을 찬양했고 문명사회의 그림자를 비판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미니멀리즘의 분위기를 찾은 것은 완전히 의외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세기의 우직한 생태주의자에게 현대 디자인의 기조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월든」에는 미니멀리즘이 부흥하고 있는 이 시점에 도움이 될만한 측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해봅시다. 미니멀리스트의 「월든」을.
호숫가의 건축가
이 책의 초반부에서 소로는 멕시코 전쟁에 항의하는 의미로 문명을 떠나 월든 호숫가에 외따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2년 2달 동안 소로는 주거 환경을 포함한 모든 생활을 자연 속에서 스스로 영위했습니다. 그가 묘사하는 숲의 사계절은 흥미롭지만, 그가 작은 집을 짓는 과정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도끼 하나를 빌려 재목을 마련하고, 오래된 집을 헐어 판자와 창문을 구하고, 벽을 세우고 지하실을 만들며 지붕을 얹습니다. 이 간결한 과정을 마친 후 소로는 세간의 ‘건축가’를 평가합니다.
감상적인 건축 개혁가인 그는 건물의 토대에서 시작하지 않고 처마 돌림띠에서 시작했다. 그것은 모든 사탕 과자 안에 아몬드나 캐러웨이의 열매를 넣듯이, 장식 안에 진리의 핵심을 집어넣으려는 것과 같다.
- 제 1장 - 숲 생활의 경제학
보시다시피 꽤 각박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택의 합목적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소로의 태도와도 유관합니다. 길이 15피트, 폭 10피트의 28달러(오늘날의 약 850달러)짜리 오두막은 그런 그의 생각을 대표합니다. 크기, 장식의 여부, 가구의 개수 이런 지표는 집의 부가적인 속성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필요에 따라 설계하고 제작하다 보니 따라붙게 된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분명 미니멀리즘적입니다. 오로지 본질을 따릅니다. 나머지는 전부 부차적인 일입니다. 심지어 미니멀리즘 특유의 간결한 형태마저 부차적입니다. 본질을 목적으로 디자인하다 보니 불가결하게 구현된 겁니다.
최소를 위한 최대
소로는 책 전반에 걸쳐 자신의 탐구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효모 없이 순수한 호밀가루로만 빵을 굽기도 하고,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줄기가 부러지는 딸기를 관찰하기도 하며, 호수의 개구리 떼가 밤새도록 우는 양상을 자세히 묘사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작은 환경의 단면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일 자체가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크린도어가 여닫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젖은 종이가 구부러지는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 섬유유연제가 어떻게 스며드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집중할 부분은 탐구 그 자체입니다.
채식주의자인 소로가 사냥과 낚시를 바람직한 교육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 탐구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탐구, 즉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연구행위는 관찰을 바탕으로 진행됩니다. 사냥감을 쫓을 때는 흔적을 포함해서 사냥감의 모든 습성을 파악해야 합니다. 어떤 때에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식으로 하는지 모든 행동 양식을 알아야 합니다. 날카로운 UX 리서치와 토끼 사냥은 그다지 차이가 없는 겁니다.
탐구성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사냥과 낚시에서 성장합니다. 물론 그는 사냥하고 낚시하는 아이가 성장하며 ‘시인으로서든 박물학자로서든 자신의 진정한 목표를 찾게 되어 총과 낚싯대를 버리게 된다.’라고 덧붙입니다. 그에게 사냥과 낚시는 탐구성을 기르는 학습의 도구인 것입니다.
이런 탐구과정이 중요한 일은 미니멀리즘에는 본질을 포착하는 준비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미니멀리즘은 버릴 게 없을 때까지 버립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본질만을 남깁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뜯어보고, 여러 실험을 통해 본질이라고 여겨지는 교집합을 찾아야 합니다.
이방인의 미학
소로의 다소 감성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향수를 일으킬 만한 문장은 보이지 않습니다. 고향 콩코드에 살면서 콩코드를 자랑스러워하지만 늘 새로운 무언가를 상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월든 호숫가에서의 생활을 스스로 ‘실험’이라고 칭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일입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들판에서 빵을 굽고, 콩밭에서 김매고, 얼어붙은 호수의 깊이를 잽니다. 거리낌 없이 행하고 망설임 없이 경험으로 여깁니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방향으로 시도합니다. 이런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소로 본인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
안타까운 것은 예전에 여기 살던 사람들을 회상하는 것이 이 아름다운 경치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도시 자리엘 다시 세워진 도시에서는 결코 살고 싶지 않다. 그곳에서는 건축 자재란 폐허에서 뜯어오는 것일 것이며 정원은 묘지 자리일 테니까 말이다.
- 제 14장 - 전에 살던 사람들, 그리고 겨울의 방문객들
미니멀리즘은 개선이 아닌 창조의 한 양식입니다. 헐거워진 볼트를 조이는 렌치가 아닙니다. 주조 틀을 비우고 신선한 쇳물을 담는 과정입니다. 화려한 상들리에의 장식을 모조리 떼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 빛이라는 조명의 본질을 되찾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미니멀리즘입니다. 좋은 디자인을 위한 한 가지 본질을 목표로 파괴하고 창조하는 겁니다. 미니멀리스트가 공백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미니멀리스트는 「월든」을 읽는다
위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미니멀리스트는 3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미니멀리스트는 합리적인 목적성을 갖는다.
- 미니멀리스트는 탐구적이다.
- 미니멀리스트는 늘 새롭다.
1960년대에 미니멀리즘이 탄생했고,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인터렉션 디자인에 사용되었습니다. 구글의 검색창부터 Windows 8의 타일 메뉴까지 많은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디스플레이 속 세상을 바꿔나갔습니다. 아직도 그 완성은 멀다고 생각합니다. 간결함을 추구하는 이 양식은 그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소로의 예에서 볼 수 있듯, 200년 전에도 있던 생각입니다.
어떤 이들은 미니멀리즘이 단조롭고 지루하다고 말할 겁니다. 귀찮은 작자가 몇 덩이의 블록을 내놓은 ‘쉬운’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며 그 가치나 의미를 가벼이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미니멀리즘은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차갑게 얼어붙어 의미를 상실한 권태로운 양식이 아닙니다. 미니멀리즘은 자신의 역동성을 숨기지 않습니다. 매혹하지 않고, 유혹당하지 않으면서 순수한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말끔하고 직설적입니다. 무엇이 전부인지를 말할 수 있고, 무엇을 집중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이 미니멀리즘이 가진 상냥한 철학입니다.
우리의 눈을 감기는 빛은 우리에겐 어두움에 불과하다.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날만이 동이 트는 것이다. 동이 틀 날은 또 있다.
- 제 18장 - 맺는 말
참고자료
「월든」 - 강승영 번역, 이레(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