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존에서 비극은 현실이 된다. <음향과 분노>
독자는 하소연합니다. 소설을 3번이나 읽었는데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고. 작가는 간결한 해법을 제시합니다. ‘4번 읽으시오.’
윌리엄 포크너(William Cuthbert Faulkner)와 <음향과 분노(The Sound and the Fury)>에 얽힌 일화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얼마나 대단한 걸 썼길래 저리도 자신만만할 수 있는지 작가의 태도에 우선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번 읽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걸 세 번이나 읽은 그 독자야말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음향과 분노>는 난해합니다. 플롯, 사건의 인과, 서술까지… 소설의 거의 모든 부분이 그렇습니다. 독자는 두려움에 떨면서 첫 장을 넘기는 수밖에 없을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작가가 잘 설계한 작품 속 무질서를 즐길 수 있도록 아래와 같은 구도를 렌즈 삼아 글을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음향과 분노>는 미국 남부, 남북 전쟁 후 차츰 몰락하는 콤프슨 가문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현실’(=부조리, 비이성, 현상적, 통합된)이 ‘순수’(=논리적, 이성적, 의도적, 개별화된)의 자리를 꿰차는지 표현합니다. 이는 3가지 모호한 영역, 즉 회색 지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피해-가해의 회색 지대
- 의도-우연의 회색 지대
- 사고-문장의 회색 지대
위에서 설명한 난해함은 이 흐릿함 자체를 묘사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먼저 작품의 구성을 요약한 후, 각각의 회색 지대가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도서 | 피츠제럴드 단편선(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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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윌리엄 포크너 |
역자 | 오정환 |
출판사 | 동서문화사 |
분량 | 816쪽 |
가격 | 13,500원 |
구성·줄거리
주요 인물
콤프슨가
- 부 제이슨
- 모 캐롤라인
- 장남 퀜틴
- 장녀 캔더스(캐디)
- 차남 제이슨
- 말남 벤자민(벤지)
- 캔더스의 딸 퀜틴
흑인 하인들
- 딜시
- 딜시의 자식 티 피, 프로니
- 프로니의 아들 러스터
배경
콤프슨 저택, 하버드 대학교와 그 인근
1장
화자는 벤지. 많은 소설이 초장에 설명적인 구절을 배치합니다. 이야기의 배경과 분위기를 전달해 앞으로 펼쳐질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음향과 분노>의 1장은 다릅니다. 독해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서술의 성격이 화자 중심적인 데다가, 그 화자가 정신병자이기 때문입니다.
벤지의 문장은 조직성이 결여된 이미지의 원시적 나열에 가깝습니다. 문장의 서체가 돋움체로 바뀔 때마다(원작에서는 이탤릭체) 전환되는 시간대도 독자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1장에서는 1900~1928년 사이 14개의 시간선이 길게는 몇 페이지 사이에, 짧게는 몇 단어 사이에 휙 변경됩니다. 사건-의식-배경은 끈끈히 뒤섞여 분리할 수 없습니다. 독자는 그 흔적을 엮을 나름의 논리를 개발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하며 진상을 그립니다.
1장은 작품에서 가장 복잡한 장이지만 가장 평화로운 장면이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유년기의 형제들, 하인의 어린 아들까지 온 아이들이 모여 샛강에서 노는 부분입니다. 목가적인 분위기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캐디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초반의 캐디는 인동덩굴로 비유되는 다정한 누나로 우는 벤지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묘한 암시가 눈에 밟힙니다. 그녀는 불쑥 결혼해 저택을 떠납니다. 그다음부터는 이별의 연속입니다. 큰형의 자살, 아버지의 죽음, 할머니의 장례식, 심지어 자신의 거세. 끝없는 하강 국면. 어떤 표현도 없지만 고스란히 드러나는 상실, 고통. 내용을 갈무리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이 할머니의 장례식날 잠이 드는 형제들의 모습으로 1장은 마무리됩니다.
2장
화자는 퀜틴. 가장 서정적인 장입니다. 무사히 1장을 넘긴 독자라면 한결 평범해진 문체에 안도할 겁니다. 그러나 2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벤지가 개별화되지 않은 외부 묘사로 독자를 난감하게 했다면, 퀜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인물의 내면에 끌어들임으로써 독자의 방향 감각을 잃게 합니다.
1910년 보스턴. 가문의 땅을 팔아 하버드에 온 퀜틴이지만 그는 지쳐 있습니다. 현재 시점의 그는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합니다. 자꾸만 과거로, 기억, 제 생각 속으로 빠져듭니다. 퀜틴의 눈으로 본 콤프슨 가의 이들은 1장과 사뭇 다릅니다. 술에 절어 사는 아버지는 냉소적인 태도로 퀜틴이 가진 온갖 믿음과 가치관을 부정합니다. 어머니는 콤프슨 가에 대한 피해망상이 있습니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태도로 남편을 비난하고 자식을 편애합니다. 여동생은 순결을 잃고 결혼합니다. 이 모든 일이 퀜틴의 순수성에 대한 믿음을 망가뜨리고 그는 무너집니다. 그는 강에 빠져 죽기 위해 6파운드 다리미 두 개를 삽니다. 정처 없이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기숙사로 돌아옵니다. 때를 기다립니다.
3장
화자는 제이슨. 분노, 억울함, 속도감 있고 맛깔나는 독백으로 가득한 장입니다. 제이슨은 아버지와 형이 죽은 집안에서 가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헤어진 캐디의 딸, 퀜틴(형의 이름과 같은)도 함께 살고 있지만 사이는 좋지 못합니다. 캐디가 매달 그녀 앞으로 보내는 돈은 제이슨이 공갈하고 있습니다. 그는 땅까지 팔아 하버드에 보낸 형, 부유한 남자와 결혼했던 누나와 달리 아무것도 받지 못했지만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신세와, 자신이 ‘응당’ 받아야 했을 기회에 대해 시종일관 투덜댑니다. 하지만 책임을 놓지는 않습니다.
4장
1~3부와 달리 작가 시점으로 서술됩니다. 여느 날처럼 퀜틴과 싸우고 난 다음 날 아침, 제이슨은 아침 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은 그녀를 찾아 방으로 올라갑니다. 퀜틴은 가출했습니다. 제이슨이 금고에 숨겨둔 돈과 함께. 몰래 빼돌린 돈이었기 때문에 제이슨은 제대로 된 도움도 구하지 못한 채 홀로 추적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그 사이 딜시는 자식, 손자, 그리고 벤지와 교회에 갑니다. 목사의 설교 도중 그녀는 벤지를 통해 콤프슨 가의 몰락을 통감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1. 피해-가해의 회색지대
<음향과 분노>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망해가는 가문과 그 일원의 반목·신세 한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받은 피해만 푸념합니다. 한결같이 남 탓을 늘어놓는 제이슨은 말할 것도 없고, 말 못 하는 백치 벤지의 유일한 의사 표명 방식도 ‘울음’입니다. 퀜틴은 근친상간을 위증으로써 여동생 캐디의 ‘문란함’을 더 큰 죄로 덮으려 하지만, 비타협적인 질서(순수성)를 지키기 위한 자기중심적인 순교 시도일 뿐입니다. 오직 흑인 하녀 딜시만이 이 가문을 위해 조용히 눈물을 내놓습니다. 그 외에는 전부, 아버지 제이슨, 어머니 캐롤라인, 캐디와 캐디의 딸 퀜틴, 심지어 딜시의 자녀와 손자까지… 모두 툴툴댈 줄만 압니다. 대체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비극 속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찾아 비극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저 사람 때문에 고통받는다.’ 질서가 생기니 구도가 단순해집니다. 이미지가 선명해집니다. 보기는 좋아졌지만, 이걸 현실적인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포크너는 쉽게 ‘피해자’, ‘가해자’ 딱지를 붙일 수 없는 이야기로 페이지 위에 숨 막히는 현실성을 재현해 냅니다.
벤지는 거세당합니다. 그는 결혼하여 집을 떠난 캐디를 수년간 그리워했고, 우연히 한 소녀가 유년기의 캐디가 하교하는 그 시간 그 장소에 꼭 맞게 등장했으며, 우연히 정원의 문이 잠기지 않아 그가 뛰쳐나갈 수 있었고, 소녀를 붙잡은 그가 할 수 있는 표현이라곤 울부짖는 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퀜틴은 자살합니다. 땅까지 팔아 그를 대학에 보낸 가문의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버지의 말과 캐디의 행동이 그가 믿었던 도덕을 깨부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화가 나 캐디의 애인을 찾아갔으나 손수 권총까지 쥐였음에도 그를 쏘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 나약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제이슨은 돈을 도둑질당합니다. 그 돈은 고지식한 직장(상점) 주인, 운이 따라주지 않는 주식 시장, 히스테릭한 노모, 자꾸 와서 칭얼대는 누나의 방해를 이겨내고 모은 보상이자, 죽은 아버지와 형이 탕진하고 간, 자신이 응당 받아야 했을 기회였습니다. 이를 위해 거짓말과 협박도 서슴지 않았고, 조카에게도 모질게 굴었지만, 도리어 이 때문에 돈을 되찾지 못합니다.
콤프슨 가 몰락의 피해자는 누구인가요? 가해자는? 일련의 에피소드에서 각 인물의 위치는 마구 뒤섞입니다. 구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저 서로에게 울부짖습니다. 방향 잃은 분노가 가득합니다. 비극은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 됩니다.
2. 의도-우연의 회색지대
피해자와 가해자의 모호성이 비극의 큰 틀 역할을 한다면, 여기에 깊이를 만드는 건 의도와 우연의 모호성입니다.
<음향과 분노>의 인물은 피해와 가해를 구분하기 위해, 먼저 의도와 우연을 판단합니다. 벼락에 맞아 죽었다면 운 나쁜 사고사지만, 계획과 살의로 살해당했다면 살인이니까요. 1~3부의 화자는 모두 이 일에 매달리지만, 결과는 제각각입니다.
벤지는 우연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오로지 현상만을 얘기합니다. 이 세계에는 골프 치는 사람은 없고 팔을 휘두르는 사람만이 있습니다. 가깝거나 멀리 있는 것은 없고 크거나 작은 것만이 있습니다. 타인의 알 수 없는 속내도, 사건의 원인도, 따라서 시간도 의미가 없습니다. 단편적인 감각(물, 불꽃, 인동덩굴 향)만이 스치듯 지나갑니다. 자신의 울음도 우연입니다. 해가 뜨고 해가 집니다. 거기엔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의도도 없습니다.
제이슨의 눈에는 의도만 보입니다. 모두가 간계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그의 행동이 사후적인 이유는 이런 사고방식에 있습니다. 그가 벌이는 일은 다른 일에 대한 변상이나 대응입니다. 그의 행위는 또 다른 사건을 일으키고, 그는 다시 그 사건에 맞서기 위해 준비합니다. 그는 쓰러지는 도미노에 쫓겨가며, 얼마 안 가 마찬가지로 무너질 블록을 세웁니다.
퀜틴은 의도와 우연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심합니다. 그의 의식은 물음과 가정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캐디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그녀와 지옥에 갈 수 있다면, 내가 물에 빠져 죽는다면. 의도의 결과인가, 우연의 장난인가. 그는 계속해서 점치지만, 정작 점을 볼 줄 모릅니다.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까요? 콤프슨 가의 몰락은 누군가의 계략인가요, 신의 농간인가요? 쉽게 선택할 수 없습니다. 피해-가해의 흐릿함으로 포착된 비극은 이를 규명하려는 시도로 인해 더 깊은 모호함의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3. 사고-문장의 회색지대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인물은 이를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누가 피해자고 가해자인지, 어디까지 의도된 것이고 우연히 일어난 일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시도는 좌절됩니다. 혼돈입니다. 하지만 독자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부분인 인물이 전체인 비극을 파악하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동등한 입장에서 작품과 마주할 수 있는 독자라면 다를지도 모릅니다. 작중 인물의 눈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대상, 소설의 문장을 통해서요.
문장은 소설의 세계를 대변합니다. 인물의 가장 내면적인 감정에서 거대한 우주적 질서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세계의 모든 부분을 문장으로 전달받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물의 사고와 실제 세계를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줄리엣이 죽은 줄 알고 독약을 삼키는 로미오에게 느끼는 안타까움, 한없이 진지한 태도로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돈키호테에게 느끼는 우스움은, 소설에서 어디까지가 개별 인물의 주관적 영역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짜 세계인지 구별할 수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음향과 분노>에서는 이마저도 불가능합니다. 저자는 독자를 인물 가까이 붙여놓습니다. 둘은 너무 딱 달라붙어 있어서 독자의 눈, 즉 문장에는 인물의 표정과 몸짓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큰 그림은 시야 밖에 있습니다. 대신 인물이 느끼는 혼란스러움이 날 것 그대로 전달됩니다. 일직선의 시간 진행, 어순 등 문장 질서가 헝클어집니다. 인물의 사고와 문장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문장을 통한 전체상의 확보는 좌절됩니다. 독자라는 특권적 지위까지 동원했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실패했습니다.
저자는 어떠한 설명도 분석도 요원한 ‘비극’이라는 현상 자체를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피해-가해, 의도-우연의 구별이 불가능한 서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서사 상위 차원의 존재인 독자는 문장을 통해 이를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메타성을 덜어낸, 인물의 주관적 사고와 일체화된 문장을 썼습니다. 독자는 장님이, 작품은 코끼리가 됩니다.
작품의 다면성과 독자의 즐거움
이번 글에서는 소설의 구조를 살펴봤지만, <음향과 분노>는 이외에도 볼거리가 많습니다. 4악장짜리 교향곡 같은 음악적 짜임새, 단테 등 고전 문학의 미장센이나, 유사한 발음을 이용한 워드 플레이(Wordplay), 정신없는 문장 속에서 빛나는 운율감 같은 점입니다.
오정환의 번역은 직관적인 편이지만 국어와 어울리지 않은 부분이 여럿 보입니다. 번역의 본질적인 한계라 역자의 노력을 탓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원어를 읽을 줄 알았다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만 있습니다.
<음향과 분노>는 만화경처럼 다면적인 작품입니다. 이러한 다면성이 문학을 더 오래, 여러 번 즐길 수 있게 해주고, 독자는 다만 고전이 가져다주는 황홀경에 호사로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