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주인공은 당신, 독자입니다. 애석하게도. <설국>

국경의 긴 터널을… 다 아실 테니 생략. 적적한 설경을 환상적인 문체로 그려낸 <설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정수로 불리며,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다 준 작품입니다. 특히 문장이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이 책의 표현에 관해서는 다들 입을 맞춰 찬탄합니다.

그런데 내용은, 특히 주인공에 대해서는 갸우뚱합니다. 비난도 적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상반된 반응이 나올 수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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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설국(범우문고, 4판)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역자 김진욱
출판사 범우사
분량 201쪽
가격 4,900원

줄거리

여름, 겨울, 봄을 건너뛰고 가을. 작은 온천 마을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세 계절로 분절되어 있습니다. 화자 시마무라는 부모 유산으로 호의호식하는 남자입니다. 쓸모 있는 일이라면 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듯 보입니다. 실제로는 본 적도 없는 서양 무용에 관해 글을 쓰고, 이유 없이 힘 빼는 일인 것 같아 등산을 즐깁니다.

시마무라는 소녀 게이샤 고마코와 만나기 위해 온천 마을로 여행갑니다. 고마코는 시마무라와 반대로 활력이 넘치는 인물입니다. 병든 춤 스승을 모시며 타향살이하는 와중에도 꿋꿋합니다. 소설의 얼마 안 되는 대사 중에서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언어에는 바쁘고 깔끔한 생활감이 엿보입니다.

고마코는 게이샤로 나서면서까지 일하는 까닭은 외지에서 병에 걸린 유키오에게 요양비를 보내기 위함입니다. 소꿉친구이자 춤 스승의 아들인 유키오와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약혼자(고마코 자신은 부정하지만)라고 생각될 만큼 각별한 관계입니다. 유키오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아 부모가 있는 온천 마을로 돌아옵니다. 그에게는 1명의 동행자가 있습니다. 요코라는 이름의 소녀, 그의 새 연인입니다.

유키오는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습니다. 춤 스승도 곧 따라갑니다. 고마코와 요코만 남았습니다. 이 모든 일에도 예전처럼 자신의 삶을 사는 고마코, 유키오의 무덤에 살다시피 하는 요코. 시마무라는 무력함을 느끼고 떠나려 합니다.

시마무라의 관조와 비극 독자의 시선은 닮았습니다.

With Tea

‘아니 이게 맞아?’ 시마무라는 두 소녀의 가슴 아픈 상황을 바로 곁에서 지켜봅니다. 하지만 무엇도 하지 않습니다. 조력과 공감은커녕 상투적인 위로 한마디도 없습니다. 쫓기듯 혹은 뭔가 잊으려는 듯 바삐 일하는 고마코가 술에 취해 찾아와도 사연을 묻지 않습니다. 유키오가 죽은 후 그의 묘에 살다시피 한 요코가 고마코를 부탁하지만,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대답합니다. 그 밖에도 무수한 절절함이 발길에 차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의 눈에는 신록의 산, 요염한 반딧불이, 광대한 은하수 따위가 담깁니다. 삶의 우수는 그의 각막을 거쳐 비현실적인 미가 됩니다. 그의 관조는 잔인합니다. 비인간적입니다. 저는 그처럼 무정한 생물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독자입니다.

시마무라의 시선은 비극 독자의 그것처럼 움직입니다. 독자는 비극을 관람합니다. 인물의 슬픔과 고뇌에 한탄하고, 고약한 운명에 혀를 찹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격정에 지배당하지는 않습니다. 절망은 활자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프레임, 스크린 밖으로 나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고로 소화한 가상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비극에서 고통이 증발하고 아름다움이 남습니다. ‘그래, 삶은 이런 거였지.’ 씁쓸한 박수가 드문드문 터져 나옵니다. 좋은 작품을 봤다는 만족감과 함께 책장이 덮이고 막이 내립니다. 독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진짜 현실과 재회하러 일어섭니다.

이 관점에서 <설국>을 읽으면 다시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과 인터미션처럼 기능하는 터널 씬, 기차 유리창과 경대 거울이라는 프레임 위에서 몸짓하는 두 소녀, 페이지를 놓친 듯 뚝뚝 단절된 대화, 그 사이사이에 영화 컷처럼 끼워진 인물 묘사… 이 책이 말하는 건 비극이 아닙니다. 그 독자죠. 시마무라의 수수방관을 힐난하고 싶어지는 건, 독자로서 찔리는 부분이 있어서인지도 모릅니다.

가련한 여주인공에서 살아 있는 인격체로

가상현실이라니, 그럼 시마무라는 현실 도피자에 불과한 걸까요? 야스나리의 문장은 탐미주의자의 잠꼬대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걸까요?

사마무라는 두 소녀의 비극을 거리를 두고 대하지만, 오역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을 멋대로 구제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비극의 극복을 제안하지 않습니다. 불필요하거나,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고마코는 유키오가 죽은 후에도 게이샤 일을 계속합니다. 그녀는 단지 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동합니다. 똑 부러지는 태도를 가진 고마코에게 시마무라는 ‘어떤 일도 해줄 수 없’습니다. 요코는 아직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연고도 없는 땅에서 문드러져 가는 그녀에게 시마무라는 도쿄행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새 출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구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건 쉽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구해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어떨까요? 혹은 알아서 헤엄치는 사람을 구한다고 설치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요? 모두 맥락이 고려되지 않은 일방적 구원입니다. 두 소녀를 각각의 사연과 생각이 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는 인물로 보는 것. 시마무라가 경계하는 부분도 이것입니다. 그의 수동성으로 고마코와 요코는 비극의 여주인공에서 주체성을 지닌 인간이 됩니다. 그는 너무나 성숙하기에 비인간적입니다.

그리하여 시마무라는 <두 도시 이야기>의 시드니처럼 영웅적인 희생도 하지 않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로버트처럼 초인적인 최후를 맞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타오르는 무대를 배경으로 울부짖는 인물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개를 돌리고, 지상의 비극과는 딴판으로 평온한 은하수를 감상하는 것뿐입니다.

인간을 삼키는 비극

Kawabata at work at his house in Hase, Kamakura (1946)

출처 : Wikipedia

참 쉽지 않은 세계입니다. <설국>이 묘사하는 세계는 정적과 소란, 정의와 부조리, 생명과 죽음이 뒤섞여 경계가 모호한 곳입니다.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는 태어나서 중학교 2학년이 되는 1914년까지 순서대로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누나, 할아버지까지 친족의 죽음을 끊임없이 지켜봤습니다. 소년에게 죽음은 실로 먼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야스나리는 자살인지 사고인지 모를 가스 중독으로 74세에 죽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생사의 모호성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던 그는 최후마저 풀 수 없는 미스터리로 스러졌습니다. 유유자적 중의 긴장감, 끝이 보이지 않는 무력감. 작가는 참 어울리는 글을 썼습니다.

모든 것이 어지러운 아지랑이로 흐트러지는 세계. 그 속에서 <설국>의 인물은 산 채로 비극에 집어삼켜집니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비극과의 눈싸움을 그치지는 않습니다. 슬픈 용기입니다. 아름다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