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꾼들 혹은 도박꾼들. <피츠제럴드 단편선>
<낙원의 이편(This Side of Paradise)>, <밤은 부드러워(Tender Is the Night)>, 그리고 물론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오늘날까지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건 장편 작품입니다. 하지만 44년의 생애 동안 160여 편에 달하는 단편을 쓴 그는 우선 단편 작가입니다.
많은 글이 대중잡지 독자 입맛에 맞춘 통속적 내용으로 쓰였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쓰인 그 작품들에 좋은 평가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작가 본인부터 스스럼 없이 그 가치를 깎아내렸습니다.
그러나 좋은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좋은 작품을 쓰게 되는 법입니다. 무수한 단편 전부가 고른 질을 가지고 있다고는 못하겠지만, 도리어 그 점 때문에 탐험 끝에 찾은 걸작이 더욱 돋보입니다. 이렇게 꼽은 작품으로 장편에서 볼 수 없었던 드라마며 연출이며 갖가지 면모를 훌훌 가볍게 둘러볼 수 있습니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을 관통하는 중심 테마를 소개하고, 각 작품에서 변주되는 모습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도서 | 피츠제럴드 단편선(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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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F. 스콧 피츠제럴드 |
역자 | 김욱동 |
출판사 | 민음사 |
분량 | 404쪽 |
가격 | 10,000원 |
출구 없는 ‘파산’ 상태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1줄로 요약하자면 위와 같습니다. 작가는 휘황찬란한 파티와 식지 않는 야경을 그립니다. 한데 그 묘사의 인상은 활기와 풍요로움이 아니라 헐벗은 불안과 위태로움입니다. 그의 글에서 한결같이 드러나는 주제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몰려 있습니다. 돈, 사랑, 사람, 역할, 행복… 그들은 염원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성취에는 다다르지 못합니다. 시도, 실패, 좌절, 재기, 그러나 여지 없이 상실. 저자는 옴짝달싹 못 하는 구렁텅이 속 인물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합니다. 그 시선은 3개의 방향으로 뻗어 있습니다.
- 물질적인 해결 시도의 실패
- 파산 끝에 인물이 선택하는 두 가지 길
- 파산이 발생하는 근본적 이유
물질적 파산 해소는 정신적 영역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피츠제럴드의 이야기에는 경제적 성공을 거뒀지만 끝내 본래의 바람은 이루지 못한 이들이 등장합니다.
<겨울 꿈(Winter Dreams)>의 소년 덱스터는 아름다운 부잣집 딸 주디 존스를 사모합니다. 젊을 때부터 사업에 몰두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그는 주디의 애인이 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팜므파탈과의 교제는 생각과 달랐습니다. 충족의 희열에 지배됐던 짧은 나날이 지나가자 자신에게 무관심해진 여자가 보였습니다. 덱스터는 다른 여자와 약혼합니다. 주디는 그를 달래듯 회유해보지만, 마음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마침 전쟁이 납니다. 덱스터는 안도하듯 장교 훈련소로 달아납니다. 십여 년 후 더욱 성공한 덱스터는 술꾼의 아내가 되어 이전의 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주디의 소식을 전해 듣고 상실감을 느낍니다.
<‘분별 있는 일’(‘The Sensible Thing’)>도 비슷합니다. 보험 회사에서 해고당한 조지 오켈리는 존퀼 캐리에게 실연당합니다. 그는 노력과 천운으로 단기간에 상당한 직업적 지위를 쟁취합니다. 오켈리는 다시 찾은 존퀼에게 입맞춤을 받지만, 그가 얻은 건 지나간 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감상뿐입니다.
위 인물들은 이상 성취의 장애물을 물질적 부족으로 보고 이를 극복합니다. 그러나 소망했던 만족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물질적 파산은 정신적 파산과 한 몸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전자의 해결이 후자의 해소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애쓴 만큼 기대도 큰 탓에 인물의 공허함은 배가 됩니다.
피츠제럴드는 대공황 시기에 글을 썼습니다. 당시 미국은 1차 세계대전 특수로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던 중이었습니다. 파티 피플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작품에 드러난 물질적 가치에 대한 회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 이외의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착잡함은 이런 배경에 기인합니다. <부잣집 아이(The Rich Boy)>에서 유복한 집안의 장남인 맨슨이 청년기에는 가정·사회적 인간관계와 직업적 성취는 물론 사랑까지 성공한 남자로 묘사되다, 나이가 들며 하나 둘씩 잃어버리고 끝에서는 화자의 동정을 사는 상황으로 전락하는 것도, 그런 특징이 드러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파산의 끝은 어떨까요?
승복하지 않는 이상주의자
파산 상태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작중 인물은 크게 2가지 길을 갑니다.
첫째는 ‘절망’입니다. 앞서 언급한 <겨울 꿈>, <‘분별 있는 일’>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탈출은 실패하고 인물은 주저앉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건 두 번째 길인 ‘재기’입니다. 이 길을 걷는 인물은 이상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똑같은 이상에 몸을 던집니다.
<다시 찾아온 바빌론(Babylon Revisited)>의 찰리 웨일스는 호황기에 방탕한 생활을 했던 파리로 돌아옵니다. 딸과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흥청망청했던 시절, 남자의 아내는 술에 절어 요양소까지 들어간 남편에게 실망하여 죽기 직전 딸을 언니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정신을 차립니다. 새 출발 하려고 합니다. 그 일환으로 딸을 데려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안 그래도 높았던 처제의 마음의 벽은, 찰리가 무절제했던 때 어울린 패거리의 난입으로 더욱 단단해지고 맙니다. 기회는 날아갔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이를 되찾기 위해 이 증오하는 도시에 돌아올 것임을 다짐합니다.
초반 몇 장에서 독자는 전 난봉꾼인 찰리를 믿지 않습니다. 뻔뻔함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츰 딸에게 진심인 그에게 마음을 엽니다. 그가 과거에 했던 일 때문에 현재의 이상이 좌절되는, 그리스 비극 같은 순간에는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다음 그는 다시 도전하려고 합니다. 찰리의 이상은 정죄입니다. 인물의 목적은 보다 나은 자가 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상에 타협은 없습니다. 그를 응원해야 하나 고민됩니다. 속 없이 화려한 줄만 알았던 피츠제럴드식 낭만주의는 이제 독자를 시험합니다.
<기나긴 외출(The Long Wayout)>에 이르면 ‘재기’는 카프카스러운, 아니 그보단 엘런 포 같은 귀기까지 내보입니다. 이야기에서 22살 킹 부인은 둘째 아이를 낳다 병든 몸을 치료하러 요양원에 있습니다. 회복은 순조로워 남편과 여행할 계획까지 세웁니다. 그런데 약속한 날 남편은 요양소로 오다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처음에 요양원 사람들은 기대감에 가득 찬 킹 부인에게 사실을 알리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사실을 알려줘도 킹 부인이 믿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녀는 매일 옷을 갖추고, 면회실에 가고, 기다리다, 남편이 내일 올 거라고 믿고 생을 하루 연장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승산이 보이지 이상에 다시 도전하는가. 어째서 그들의 파산에는 출구가 없는가.
이상의 실현 가능성 앞에서 멈출 수 없는 도박꾼
피츠제럴드 작품은 인물의 행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갈망하고, 돈을 벌고, 떠벌리고, 협상하고, 승부하고, 사고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그들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 행동한다는 것은 주사위를 굴리는 일과 같습니다. 1이냐 6이냐, 원 페어거냐 플러쉬거냐, 불운이냐 행운이냐, 죽느냐 사느냐. 행동에는 결과가 뒤따릅니다. 심지어 아무 결과가 나지 않는다는 결과마저 포함합니다.
-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일어난다.’,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타자기를 멋대로 두들기는 원숭이는 셰익스피어를 쓸 수 있다.’ 아주 조그마하더라도, 어떤 결과가 일어날 가망이 있다면 그 결과는 발생합니다.
위 2가지 사실을 조합하면 작중 인물의 행동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실현 가능성이 실낱같더라도, 일단 존재한다면 그 희박한 확률에 판돈을 걸어야 합니다. 패배, 다음 판, 또 패배, 다시 다음 판. 희망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 동안 자신도 이상의 대상도 속절없이 변해버린다는 점입니다. 확인할 때마다 바뀌어 있는 패를 가지고 도박하는 셈입니다. 인물은 역전을 확신하며 카드를 펼치지만, 이미 알고 있던 패가 아닙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지만 시간만 있다면 승리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2 참고) 비극은 인간의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입니다. 인물은 시간을 굴복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덤벼듭니다. 그러나 파산하는 건 인물 자신입니다. 시간 앞에서 인간의 판돈은 초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사 결말을 알고 있다 해도 인물은 도박판에 자신을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상이 바로 저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도로 글을 읽으면 앞 문단에서 설명한 인물의 2가지 최후도 이해됩니다. 파산했거나, 파산하는 도중이거나. 다시 게임이 시작됩니다.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비극의 무대를 비추는 건 재즈 시대에 어울리는 황홀한 조명입니다. 그 빛은 오늘날까지도 꺼지지 않았습니다.